1.출생:1865년 12월 23일 그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남.
2.어린시절: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외웠고 글과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고
붓글씨가 뛰어나 12살 때 백일장에서 장원함. 뛰어난 재주에도 농민출신
이기에 출세할 길이 없어 싸움과 술을 좋아해 평양성 깡패가 됨. 그러나
의협심이 강한 그는 백성에게 거만하게 굴던 평양좌수를 폭행하여 옥살이함.
3.평양의 소문난 깡패:19살 때 동학운동에 가담한 후‘서양인들이 조선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하고 기독교를 핍박하
기 시작함. -1890년 평양 서문통 사거리에서 노방 전도하던 마펫선교사에
게 돌을 던져 턱뼈를 부러뜨림.
4.새사람(1894년 30세):노방 전도하던 스활른선교사의 모습을 보며 마펫 선교사의 턱뼈를 부러뜨린 일로 마
음이 심란했고 그날 밤 장엄한 음성을 들음.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는냐? 너는 나의 복음을 증언
할 사람이다”-> 깜짝 놀란 그는 곧 바로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함.
그 후 변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2년 뒤 1896년 스활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평양으로 돌아온 이
기풍은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함. 1898년(34세)부터 매서인으로 마펫 선교사를 따라
함경도 각지를 돌며 복음 전파함.
1902년부터 황해도의 여러 도시에서 조사로 일함. 이때 마펫 선교사의 권고로 1903년(39세)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함. -1907년 이기풍은 길선주,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와 함께 평양신학교 제1
회 졸업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명’이 됨.
5.제주도 최초의 선교사: 초기 사역과 계속된 수난 - 1907년 장로교 독 노회에서 제주도선교사로 이기풍목
사 파송을 결정함. 제주도에서 온갖 냉대와 배척,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했으며 굶주림과 생활고 등 모
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전파에만 전심전력함. -당시 제주도는 1899년 신축교난(대원군이 천주교인
들을 죽인사건)으로 예수교를 믿으면 죽는다는 공포가 확산되어 주민들이 기독교를 배척함. 이에 제주도 청
년들은 ‘이기풍을 제주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선동하였지만 그는 계속 전도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졌
는데 마침 해녀가 그를 발견해 구함. - 해녀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선교의 첫 열매가 됨.
6.제주도 복음전파 사역:1909년 5월 큰 홍수 때, 물에 빠진 여인을 건져내는 사건으로 제주도 도민들 사이에 이
기풍목사에 관한 좋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전도함. - 1910년 영흥학교를 세워 글을 모르는 사
람들을 가르치는 교육사업도 함. 귀신들린 자가 치료되면서 ‘목사가 병을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각종 병자
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성안교회가 설립되고 부흥이 시작됨. -성안교회를 시작으로 교회 3개와 기도처 5개를
설립해서 교인이 410명으로 부흥했고 그가 떠난 후 30개의 교회가 더 설립되었으며 1934년 노회가 조직됨.
7.전라도 농촌 순회전도와 교회개척:이후 전라도 여러 교회를 돌보았고 1913년 벌교교회로 파송됨 -1918년 광
주 북문안교회, 1923년 순천교회, 1924년 고흥교회, 1927년 제주도 성내교회, 1934년(70세) 여수 우학리에서 목회함.
8.신사참배 반대와 최후 순교의 길:1936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서 신앙을 지킨 이기풍은 1938
년 미제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신앙의 지조를 지킴.
고문 후유증으로 1942년 6월 20일, 77세로 별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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